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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소거된 세계를 향한 발칙한 테러, ‘사운드 오브 노이즈’

주도면밀하게 쫓는 자와 아슬아슬하게 쫓기는 자가 있다. 쫓는 자는 냉철해 보이는 경찰 수사관이다. ‘테러전담 책임자’라는 특별한 직책을 갖고 있다 쫓기는 자는 태연하게 테러계획을 공표한 후 계획대로 움직이는 테러집단이다. 그런데 이 6인조 테러집단의 손에 들린 것은 총이 아니라, 소리를 만들어내는 갖가지 도구들이다.

<사운드 오브 노이즈>는 이 괴상한 추격자와 탈주자들 사이의 이야기다. 배급사가 밝힌 이 영화의 장르는 ‘뮤직테러 도시정복쇼’. 이런 깜찍한 장르명칭은 영화 속 주동인물인 테러집단 멤버들의 명분과 목적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형편없는 음악에 오염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음악으로 “반격”을 준비하는 중이다. 실제로 그들의 ‘반격’은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운드 오브 노이즈>는 독특한 음악영화의 외양 이면에 뭔가 다른 전언을 은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운드 오브 노이즈>의 장르는 ‘뮤직테러 도시정복쇼’, 테러범은 “형편없는 음악에 오염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음악으로 “반격”을 준비하는 중이다.

먼저 6명의 테러범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리더 산나는 천부적인 음악성을 가졌지만, 명문 음대 재학 중 졸업 작품 공연을 하면서 사고를 친다. 황당하게도, 공연장의 스프링클러를 작동시켜 물을 연주하려 한 것이다. 그 일로 그녀는 퇴학을 당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찾는 일에 몰두한다. 매그너스는 그녀의 오른팔로 범상치 않은 상상력이 깃든 음악만을 작곡한다. 이 영화의 뼈대이기도 한 그의 근작은, 이름부터 남다른 “도시를 위한 음악과 6명의 드러머”다. 그 둘은 완벽한 테러를 위해 4명의 드러머를 섭외한다. 산나의 음대동창이지만 나이트클럽에서 취객과 싸우며 사는 미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팀파니 연주자였지만 지루하고 답답한 음악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그곳을 뛰쳐나간 안데스, 합주 공연을 하다가 날아가는 나비에 감정이 복받쳐 즉흥연주를 해버려 해고된 요하네스,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파트 전체를 몇 번 정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소리를 갖춘 전자드럼을 고민하는 마르커스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음악테러는 병원에서, 은행에서, 그리고 문화예술회관 광장에서, 그리고 도시 외곽의 전력 공급 전선탑에서 이뤄진다. 그들의 연주에 동원된 것들을 굳이 악기라고 부른다면, ‘생활밀착형 악기’라고 할 수 있겠다. 병원에서는 산소통, 핀셋, 가위, 각종 수술용 도구들이 멜로디와 비트를 만들어내는 데 동원된다. 은행에서는 지폐계수기(돈 세는 기계), 영수증인장, 동전 등이 악기라면 악기다. 한마디로, 그들은 소음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일상의 소리들로 컬트적이고 매니악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도시를 위한 음악과 6명의 드러머”의 시나리오대로 예고된 네 번의 테러를 감행한다.

테러범들을 쫓는 경찰 수사관의 이름은 뭔가 위압감을 준다. 모차르트의 라틴식 중간이름이기도 한 아마데우스가 그의 본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비범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가족구성원들처럼 재능을 물려받지 못했다. 소위 ‘모태 음치’다. 동생이 부모님의 관심 속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 것을 고려하면, 경찰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정상적이지 않다고 여겨질 정도다. 영화 속 그의 대사를 종합해 보건대, 그가 사랑하는 것은 “침묵”이요, 그가 혐오하는 것은 “음악”, 그 자체다. 짐작가는 바를 말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제도권 음악에 신물이 난만큼, 음악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주목할 것은, 이 영화의 작은 반전이다. 음악테러범을 쫓던 아마데우스와 테러범 리더인 산나가 점차 서로에게 끌리게 된 것이다. 6인조 음악테러범들이 행했던 공연은 총 네 차례. 각각의 공연마다 그들의 전복적인 상상력에 어울리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병원에서 펼쳐진 첫 번째 공연 제목은 “DOCTOR, DOCTOR, GIMME GAS IN MY ASS(의사선생님, 의사선생님, 제 엉덩이에 인공호흡해주세요)”다. 마지막 공연 “ELECTRIC LOVE(전자 사랑)”만이 비교적 차분한 톤이다. 마지막 공연은 특히 중요한대, 그것을 기점으로 아마데우스와 산나는 추격자와 탈주자 신분을 벗고 서로를 공감하게 된다. 이 순간 영민한 관객은 <사운드 오브 노이즈>를 통해 감독이 의도했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거대한 도시에 공급되는 전력이 로맨틱한 악기로 전환되는 발상도 중요하지만,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전선들 위에서 음악을 들려주는 그들의 퍼포먼스가 이미 상징적인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산나는 제도권의 음악만을 고집하는 학교의 권위에 도전했고, 병원, 은행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무대를 테러대상으로 삼았다. 이를 감안하면, “형편없는 음악에 오염된 도시”라는 산나의 최초 규정은, 기실 상상력이 소거된 현대사회를 고발하는 것이라고 추측된다. 기실 기성세대의 규율은 쉽게 도그마가 되고 현대인의 일상을 조작한다. 그러한 사회적 공간 안에서 개인이 진심으로 하고픈 것, 스스로 의미있는 것을 찾아 행하며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 눈에 띄지 않지만,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는 전선들처럼 우린 이미 구축된 질서 속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러범들이 전선탑 위에서 어둠에 잠긴 도시를 향해 마지막 연주를 할 때, 우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무대를 낯설게 관조하게 된다.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것으로 비쳐진 아마데우스와 산나도 실은 기존 음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에선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그들의 ‘끌림’도 상상력을 길들이고 제한하는 세계를 고발하기 위한 ‘연대’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보면, 아마데우스는 테러범들로부터 구원받은 첫 번째 인물인지도 모른다.

▲ <사운드 오브 노이즈>의 전복적 상상력은 대학생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한다. 기성세대가, 제도권이 만든 기존 질서 안에만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가끔 대학 도서관 열람실에서 학생들이 펼쳐 놓은 책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 또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를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그들에겐, 자신이 왜 지금 거기에 있는지를 성찰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영어시험을 준비하고, 사회적․경제적 안정성이 보장된 ‘고시’ 과목들에 매달리는 그들에게서 우리 사회는 ‘다른 길’의 가능성과 상상력의 활로를 빼앗아버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운드 오브 노이즈>의 전복적 상상력은 그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한다. 소음도 음악의 훌륭한 재료이고, 일상의 도구 무엇이든 악기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은 표면적인 힌트다. 기성세대가, 제도권이, 사회의 권위가 만들어 놓은 기존 질서 안에만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전언이다. 이상적인 말 같지만, 일이 노동이 아니라 놀이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야근을 하고도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런 일을 찾아 ‘자기만의 인생’을 기획하려는 노력은 각자의 몫이다.

 

<필자소개 : 안숭범>

시인,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학술연구교수

 

* 본 글은 필자의 동의를 구하였고, 글이 게재되고 있는 경희대학교 미디어센터(프리미엄 칼럼)의 허락을 받았습니다.